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문단 편집) ==== 개선식 ====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정부는 [[세베루스 왕조]] 성립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가장 강조한 부분, 즉 군대를 장악하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동시대 사람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 등의 증언처럼 알렉산데르는 근위대장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면전에서 피살됨에도 병사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주동자들을 질책성으로 아이깁투스로 보직전환시키는 조치만 취할 정도로 무능함을 노출했다. 이는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도 상황이 비슷해, 이들은 시리아 여제라는 평과 달리 주변을 이용해 군율조차 제대로 확립시키지 못했다. 하여 마이사, 마마이아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디오 카시우스는 군율이 형편없고 병사들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렸다고 매우 비판적으로 이 모습을 개탄했다. 더욱이 세베루스 왕조는 엘라가발루스의 4년 치세를 거치면서, 로마인들에게 괴이하고 음란한 주술행위에 심취한 시리아인으로 인식이 박혀 이를 타개할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따라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군사적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이미지 개선과 군율 확립 측면을 대대적으로 강조했다. 이런 사정으로 알렉산데르는 로마에 도착한 직후, 원로원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이끄는 로마군이 페르시아를 이겼고 동방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승전을 보고했다. 모든 상황을 다 알지 못한 원로원은 당연히 이에 환호했고, 그에게 정식 개선식을 거행토록 만장일치 의결로 답했다. 그래서 알렉산데르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개선식을 거행했다. 허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과정, 결과 모두에서 알렉산데르의 공은 전무한 군사적 업적이었고, 이는 그가 몰락한 원인이 됐다. 왜냐하면 알렉산데르가 면이 선 이유는 로마군 중 남, 북으로 향한 분견대가 본대와 달리 확실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알렉산데르의 실수로 본대도 피해를 입고, 선전하는 남쪽 분견대마저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은 탓에 도리어 군사적 무능함을 부각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그러니 헤로디아누스가 기술했듯, 알렉산데르의 이런 행동은 실상을 알고 있는 동방 군대와 도나우강 일대 장병들, 동방의 관리와 지식인들에게 위선적으로 비춰져 승리라고 하기 애매하다는 조롱으로 이어졌다. 무능함을 드러낸 시리아 총독은 이번 사태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교체하면 황제의 승리가 퇴색된다는 정치적 부담 때문인지 몰라도 유임됐고[* 이 총독이 교체된 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집권한 235년, 새황제의 인사조치를 원로원과 새 집정관이 지지한 뒤 였다.], 동방 병사들이 시급히 해결해주길 원한 주요사안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동방에서 이를 모두 지켜본 헤로디아누스는 이런 작태를 대놓고 씹었고, 동방 군단을 비롯한 로마 군단병들은 젊은 알렉산데르를 가리켜 “결단력도 없는 겁쟁이”, “전투도 제대로 수행할 줄 모르는 애송이”라고 비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